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 16, 24]
제임스 티소트의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1894년, 수채화, 14.4×21.9cm, 브루클린 미술관, 뉴욕, 미국)
이 작품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지금 파스카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원경에 사람들이 저마다 예루살렘으로 상경하고 있고, 제자들의 손에는 저마다 지팡이와 여행 보따리가 들려 있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마태 16, 13) 하고 물으셨고,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 16, 16) 하고 고백하여 교회의 반석이 되고, 천국의 열쇠도 받은 터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시어 겪게 될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두 팔을 벌리고 예수님 뒤에서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태 16,22) 얼마나 인간적이고 솔직한가? 베드로는 고통 없는 축복만을 바라는 우리를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고백으로 인해 엄청난 창피를 받게 되었다. 교회의 반석이고 천국의 열쇠를 받게 된 그가 이제는 사탄으로 몰리게 되었다. 믿음과 영광의 색인 흰옷을 입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뒤돌아보시고 손으로 그를 뿌리치며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 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 16,24) 예수님을 따르려면 소유를 버리고, 혈연까지도 버리고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 버리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6,25) 목숨은 살고자 한다. 살기 위해서 소유하려 한다. 소유가 삶의 안전을 보장해 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삶의 허상을 폭로시켜 주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삶의 모든 것을 앗아가며 죽음 앞에서는 가진 것 모두 무력해진다.
이러한 삶의 허무 속에서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죽은 지 사흗날에 되살아나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분은 죽어 다시 사는 생명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2020년 8월 30일 연중 제22주일 원주주보 들빛 4면, 손용환 요셉 신부(풍수원성당)]
– <굿뉴스 가톨릭갤러리> 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