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보고 믿었다. [요한 20, 8]
외젠 뷔르낭의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
(1898년, 캔버스에 유채, 82x134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프랑스)
동이 틀 무렵 두 남자가 들판을 가로질러 급히 달려가고 있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으로 인해 그들이 서둘러 어디론가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과연 어디로 달려가고 있을까? 앞에 있는 청년은 하얀 옷을 입고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으며,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있다. 그는 누군가 말이라도 걸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뒤에 있는 중년의 남자는 검은색 겉옷과 헝클어진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과 휑한 눈빛으로 말미암아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안 된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놀란 눈빛과 이마와 눈가에 있는 주름에서 그의 걱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손짓으로 ‘내 마음에 묻어 둔 사랑하는 분은 어디에 계실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이고,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 그림의 제목이 그 의문을 한순간에 풀어준다. 이 작품은 19세기 스위스 화가 외젠 뷔르낭(Eugene Burnand, 1850-1921)이 그린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이다.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주님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말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덤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요한이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요한 20,1-4) 성경은 간단히 기술했지만 화가는 요한과 베드로의 심정까지 묘사했다. 사랑하는 스승을 잃고 슬퍼하는 요한은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을 다시 보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교회를 책임졌던 베드로는 스승을 잃고 걱정에 휩싸인다. 예수님의 부재는 요한에게는 슬픔이었고, 베드로에게는 근심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없어도 슬퍼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로 달려가고 있을까?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처럼 무덤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을 뚫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우리는 그럴 희망이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간절히 찾지 않기 때문이다.
[2019년 4월 21일 주님 부활 대축일 원주주보 들빛 4면, 손용환 요셉 신부(캐나다 런던 성 김대건 한인성당)]
– <굿뉴스 가톨릭갤러리> 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