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 17]
안토니 반 데이크의 구리 뱀
(1620년, 캔버스에 유채, 205x235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스페인)
머리에 두 개의 뿔이 있는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나무 기둥에 달아 놓고 오른손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리 뱀을 쳐다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왼손에는 칼이 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구리 뱀을 바라보면 살게 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불신하면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아론은 모세의 뒤에서 구리 뱀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모세와 아론의 발은 지도자의 삶이 그러듯이 고난을 상징하는 맨발이다. 모세의 발 앞에는 뱀에 온 몸이 감긴 발가벗은 사람이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두 손 모아 간구하고 있다. 그는 불 뱀에게 물려 죽게 되자 모세를 찾아와 자기 죄를 참회하며 살려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나무 기둥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을 바라보고 있다. 구리 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몸에서는 불 뱀들이 풀려나 하늘로 내동댕이쳐지고 있다. 그러나 가운데 흰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아직도 구리 뱀을 바라보지 않자, 주변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구리 뱀을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여러 사람이 노력하고 있는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구약의 구리 뱀 사건을 떠올리게 하며 당신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 하는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14-15) 구리 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상징이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구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2018년 3월 11일 사순 제4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손용환 요셉 신부]
– <굿뉴스 가톨릭갤러리> 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