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요한 9, 7]
세바스티아노 리치의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시는 그리스도
(1712-16년경, 캔버스에 유채, 52×67.5cm,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18세기 베네치아 화가 세바스티아노 리치(Sebastiano Ricci, 1659-1734)는 고대 그리스 신전을 옐루살렘 성전으로 빌려왔다. 17세기 베네치아 화단을 주도했던 암흑양식 전통이 리치의 밝고 경쾌한 붓질에 의해 말끔히 씻겨 나갔다. 리치가 1712-16년경에 그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시는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9장이 배경이며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태생 소경을 고쳐주시는 기적 이야기인데, 이것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하고 선언하신 말씀의 표징이다.
태생 소경은 어둠을 깊게 체험했고, 새벽빛처럼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갈망했다. 예수님을 만난 소경은 예수님의 시선에서 세상의 빛을 느낄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요한 9,7) 하고 말씀하시자, 그 말씀대로 가서 씻고 시력을 회복했다.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곳은 옐루살렘 성전 앞이다. 성전 앞 제단에서는 희생제물의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고, 사람들의 중심에는 예수님과 태생 소경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소경의 눈에 바른다. 예수님의 옷 색깔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소경의 옷 색깔은 겸손과 믿음을 나타내며, 소경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하늘로 젖히며 손짓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부 받아들이고 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은 소경 주위에서 치유장면을 유심히 바라보며 치유의 의미를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 소경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밝은 빛이 비친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 9,5)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 등 뒤에 있는 갑옷을 입은 군사와 예복을 갖추어 입은 바리사이는 치유장면을 보며 놀라고 있다. 그들은 소경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고, 소경은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고, 그분은 하느님에게서 오셨으며, 예언자이십니다.” (요한 9,17. 30) 하고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은 그를 성전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요한 9,35) 하고 물으셨고,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요한 9,38) 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는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고 이 세상에 왔다.” (요한 9,39) 고 이르셨다.
이 기적을 목격하는 사람들 중에는 제자들과 바리사이와 군사 외에도 여인들과 아이가 있으며, 성전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도 있는데, 한 여인이 앉은뱅이에게 음식을 갖다 주고 있다. 가난한 이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자선 행위는 세상을 밝게 비추는 기적이기 때문이다.
[2020년 3월 22일 사순 제4주일 원주주보 들빛 4면, 손용환 요셉 신부(풍수원 성당)]
– <굿뉴스 가톨릭갤러리> 에서 옮김